방문을 환영합니다.
한국어

인사동 소개


 

인사동의 유래

지금의 인사동 거리는 종로 2가에서부터 인사동을 지나 관훈동 북쪽의 안국동 사거리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옛날의 인사동 길은 관훈동까지 올라가지 않고 종로 길에서 인사동 네거리 즉 태화관길과 만나는 곳까지였다. 옛날의 이 거리에는 고미술품과 고서적을 취급하는 상인과 화랑은 없었고 유명한 가구점과 병원 그리고 규모가 큰 전통 한옥이 많았다고 한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 방(坊)이라 함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도의 행정구역 명칭의 하나로 성안의 일정한 구획을 일컫는 것이다)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부른 것이라 한다.

 

인사동지역의 역사적 배경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때부터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冊祿)하기 위해서 그 업적을 조사하던 관청인 충훈부가 관훈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도적을 경비하고 법에 금한 사치스런 잔치나 풍기문란 등을 단속하던 이문(里門)이란 관청이 있었다.

또한, 인사동지역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시대를 달리해 거주했었다.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율곡, 효종때의 이완장군의 집터가 있으며 중종시절 왕도정치를 주장했던 유학자 조광조의 집이 관훈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인사동의 가장 기념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항거한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시작지라는 점이다.

근래에 와서는 신구(新舊)작가들의 저마다 독특한 작품들을 언제나 선보이는 화랑들, 한집 건너 마주치게 되는 필방들, 희귀한 고서적들,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옛스럽고 소박한 민속공예품들, 그윽한 다향(茶香)과 가야금의 청아한 선율이 흘러나오는 전통찻집, 구수한 된장국과 농익은 동동주의 주점들로 가득 차 있다.

 

인사동의 문화유적지

이완장군 집터

조선 효종 때 북벌을 주장했던 이완장군의 집터가 인사동에 있다. 원래 장군은 낙동인평대군의 집 옆에 살고 있었는데 왕족의 이웃에 사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다하여 인사동으로 이사하였다. 대략 그 자리가 지금의 종로구청 창고자리 근방이 된다.

 

독립선언 유적지

태화빌딩 앞에 독립선언 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을사경술조약 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었고 이완용의 집터이기도 하였다. 삼일운동 때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인사동 194번지 이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한용운 선생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던 태화관이 있던 곳이다.

 

박영효 대감댁의 터(현 경인미술관)

조선 철종 때 지어진 박영효 대감댁의 터

 

승동교회(삼일운동기념비)

조선시대 김흥근 대감댁이었으며 1904년 승동교회가 이전하였다. 삼일운동 때 교회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으며 교회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학생시위운동을 전개하였던 교회이다. 1939년에는 지금의 한신대학 전신인 조선학교가 개교되었으며 1993년 교회에서 삼일운동 기념비를 설치하였다.

 

구 조선일보 사옥(현 농협건물)

1926년 세워진 조선일보 최초의 신축사옥

 

서울 중심점 표석 인사동 194

현재 하나로 빌딩 옆인 인사동 194번지에 네모꼴의 화강석으로 서울의 한복판 중심지점을 표시한 표지돌로 건양원년(1896)에 세워졌다.

 

이율곡선생 집터 관훈동 197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율곡 선생의 가택이 있던 곳이다.

 

민가다헌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5호

이 집은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6호인 월계동(月溪洞) 각심재(恪心齋)와 동일한 구조이다. 이 두집은 당초 건축주가 두 자식에게 한 채씩 주기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네모가 반듯한 집터의 동쪽에 일각대문(一角大門)이 나와 있다. 마당 서북쪽에 ‘H자’형 평면의 중심 축에 놓인 부엌이 사방2칸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부엌의 앞쪽에 안방이 있고, 뒤쪽에는 부엌과 툇마루가 있다. 안방과 부엌방, 뒷방에 모두 반칸 폭의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건너방, 현관마루, 사랑방이 연결되었으며, 부엌의 동쪽으로 대청이 있다. 건넌방 동쪽에 사랑방이 있어 앞에는 누마루, 뒤쪽에는 현관마루와 현관이 나 있다. 현관마루에서 사랑방과 건넌방, 안대청, 화장실로 통할 수 있다.

이 집은 긴 섬돌 두벌대 기단(基壇)위에 네모뿔대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주춧돌 사이는 디딤돌로 막았다. 기둥은 약간 흘림에 사각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합각을 형성하였다.

이 집은 일제 때 화신백화점 등을 설계하였던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화장실과 목욕탕을 한옥 내부에 포함하고, 이것을 연결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한국주택사의 변천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의감터

조선시대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재배하던 관아 터. 조선 말에 우정총국이 들어섰다

 

도화서터

도화서는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으로 한국 전통 회화의 요람이자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민영환 집터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집터.